행복의 기원_2

담담한 2022. 9. 19. 15:03


인생에서
무엇을하고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하는 큰 요인 중 하나가
자신의 성격이다.

가장 큰 예로
미국의 911 사태 테러 때 있었던 대피 방송이다.
World trade center의 한 쪽 건물이 비행기 테러로 무너질 때
다른 한 쪽에 건물에는
'안심하고 자리로 돌아가라'는 방송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의심이 많은 성격의 사람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렇게 성격에 의해
매순간 선택을 하고
그것들이 쌓여 지금의 현재 모습이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 내면의 성격보다
외적인 것에서 행복이란 것을 판단한다.

외제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웃고 있다면
과연
외제차를 타서 행복한 것일까?
외제차를 타는 그 사람이 그냥 행복한 것일까?

결국 외적인 것 보다
그 사람의 성격이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중에서도 외향적인 성격
즉, 사회성이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어떤 사회든 행복한 사람은
타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다고 한다.

이는 선천적으로 내향적인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단지 외향적인 사람들에 비해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고 불편해서이다
(싫어서가 아니다).

외향적인 사람이든 내향적인 사람이든
같은 산을 오르는데
등에 짊어진 짐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과 오래된 연인 사이의 만남에서
내향적인 사람도 오래된 연인과의 데이트를 선택하겠지만
실제 경험은 낯선 이성과의 식사 후가 더 즐거움이 크다.



행복과 관련해
돈이 많은 이들은 경험(여행)을 사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물질(신상백, 명품)을 사는데 즐거움이 크다.

그리고 돈을 다른 사람과 함께 쓰거나
다른 이를 위해 사용할 때
더 높은 만족감을 얻는다고 한다.
(경험도 결국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진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던 자들이 더 많이 생존했고
이러한 지연선택이 지금의 사회성을 만든것이 아닐까
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생존에만 관심이 있는 뇌는
생존 가능성을 위해 사회성을 발휘할 때
극강의 행복이란 것을 보상으로 주는 것이다.
결국 가장 빈곤한 인생은 사람이 없는 인생이다



축구경기에서는
개인이 역량뿐만 아니라 팀의 분위기,
감독의 지휘력 등도 중요하다.

앞서 설명한 외향성이 개인기라면
이제 환경의 요인을 살펴봐야한다.

문화는 같은 현상을 같은 시간대에 있더라도 다르게 해석한다.

프랑스축구선수 지단의 박치기 사건이 그 예다.
연장 후반 걸어가던 지단이
이탈리아 수비수 마테라치를 향해
박치기를 한 것이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마테라치는 알제리 출신의 지단과 여동생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고
지단이 폭발한 것이다.

이후 프랑스는 축구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지단에게 존경을 담아 박치기 동상을 만들었다.

이후 2018년 월드컵 개최국인 카타르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지단 박치기 동상을 구입했다.
하지만 곧 높은 분의 화를 사고 트럭에 눕혀 실려나갔다.

예상했겠지만 프랑스는 행복해지기 유리한 조건이다.
개인의 가치와 감정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차이를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로 나눈다.

사실 개인주의는
경제 수준이 높은 국가와 행복을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한국은 어떨까?
한국은 집단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장점은 공동의 목표가 생겼을 때
무서운 응집과 추진력을 보이는 것이다.
단점은 팀이 서열에 의해
위아래 수직적으로 나뉜 관계이다.
따라서 팀원으로서 역할을 못하면
주변의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이렇게 타인 중심의 생각이 행복 성취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데 '사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한국의 초집중적 집단사회는
사람과의 관계가 더욱 밀도있게 다가온다.
(내일 소풍가서즐겁게 놀도록. 단, 개인행동은 하지 말 것- 이건 뭐지?)

한국의 이러한 응집적 집단주의는
한곳에 집중해 나가기에는 최적이지만
획일적인 사고를강요하여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 악영향을 미친다.

물론 사회일원으로서
타인의 평가와 의견을 경청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나침판이 되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 보다
타인의 반응이 더 중요해진다.
그러다 보면 삶을 경험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살게 된다.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대단한 스트레스다.
뇌는 생존을 위해
타인에 대한 나의 평가를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 임무 중 하나였다.
이러한 집중은 피로와 불안을 쉽게 불러온다.

그리고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타인의 시각을 통해서
매사를 판단하고 평가한다.

내가 즐거웠던 경험에 대해 타인에게 이야기한 경우,
다른 사람들이 별로 즐겁지 않을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면
한국에서는
'나만 좋다고? 혹시 즐거운게 아니었나?'
라고 생각하게된다.

반대로 미국인의 경우 ' 내가 즐겁다는 뭔 상관?' 으로 끝난다.
행복은 나를 세상에 증명하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행복할 만하다' 는 구체적 증거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
이쯤이면 십중팔구 돈을 생각할 것이다.
이 질문에 Yes 라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제일 높은 나라가 한국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돈을 중시하고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하루 세 끼가 보장되지 않는 아프리카보다
한국이 돈을 더 중시한다는 것을 보면 이도 맞는 말이 아니다.




과도한 물질주의와 행복 간의 마찰은 왜 일어날까?
인간은 생존 과정에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부족함을 메워 줄 수 있는 보완책이 생겼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사냥을 잘 하는 친구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돈을 들고 마트로 가면 된다.
그래서 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사람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고 한다.

즉, '자기충만감' 이라는
우쭐한 기분에 사로잡혀
'너희가 없어도 나 혼자 살수 있어' 같은 느낌이다.

생존만 목표라면
우리는 사람없이 돈만으로 살 수 있는 신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뇌는 이러한 신세계에 아직 적응이 안되었다.
그래서 뇌의 행복회로는 돈에 관심이 없다.
행복회로가 켜지려면 인간이 필요한데
돈만 추구하는 것은 돈 냄새를 따라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간 것이다.




과도한 타인 의식은 사람과의 관계를 즐겁지 않게 한다.
다른 사람을
행복에 필요한 한정된 자원을 놓고 다투는
경쟁자로 생각하다 보면
인간을 믿지 못하게 된다.

자유감의 부족과
과도한 물질주의 등으로 나타나는 증상들의
공통 원인은 너무 예민한 타인 의식이라고 말한다.

또한 각자 자기 인생의 '갑' 이 되어
살아보는 것에 익숙해 질 필요가 있다.
(필자의 경험이 있다.
피어싱과 가죽옷을 즐겨 입는 펑크족 여대학생이
고등학교 실습을 나갔다.
학생들은 누나는 왜 남자처럼 옷을 입녀고 물았다.
그녀는 말했다.
'내가 남자처럼 입고 다니는 게 아니라
남자들이 날 따라하는거야.')

행복한 문화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선택에 당당함과 자신감이 넘친다.
인생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가진 독특한 꿈, 가치, 이상을
있는 그대로 서로 존중하며 이해하는 것.
이것이 함께 사는 모습이다.

아브라함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라는 것이 있다.
피라미드 꼭대기로 갈수록
생리적 욕구(식욕 성욕)에서
고차원적인 욕구 (자아성취)로 바뀐다는 것이다.
하지만 매슬로우 이론에 위 아래가 바뀌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금강산 구경을 위해 식사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적 욕구(식욕 성욕)을 채우기 위해
금강산 구경(자아성취)를 한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적 설명이다.

즉, 먹기 위해서
금강산을 오를 생각을 한다는 것이고
금강산을 다녀온 것이
이성에게 매력으로 작용되므로
금강산을 오른 다는 것이다.
사실 피카소 칭기즈칸 마틴루터킹 간디도
대단한 여성 편력의 소유자였다.




가치있는 삶과 행복한 삶은 다른 것이다.
인간이 긍극적으로 추구해야할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말로 추구한 것은 가치있는 삶이었다.
(가치있는 삶 = 행복 이라고 해석한 것이 문제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시선)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보다
내 선택이 남에게 어떻게 평가되느냐 이다.
여기서 행복은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행복한 사람은 남의 칭송과 칭찬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에서 긍정적인 정서(기쁨)을
더 자주 경험하는 사람이다.

한 낮에 커피숍에 앉아 잡담하는 사람들은
자기절제력 부족에
쾌락주의 베짱이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연구 결과는 그 반대다.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이
어설퍼 보일지는 몰라도 건강하고
사회관계도 윤택하고
더 건강한 시민의식을 갖는다.
(행복만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자가 되라는 것은 곤란하다.
온전히 가치만 추구하는 삶이 행복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결론


행복은 거창한 생각(철학)이 아니고 행위이다.
불행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라는 것은 고
혈압환자에게
혈압을 낮추는 생각을 하라는 것과 같다.
행복은 행위다.

두번째는 인간이 왜 행복을 느끼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본질적인 쾌감은
먹을 때, 섹스할 때,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그런 점에서
행복을 하나의 사진에 담는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행복은 이러한 장면이 가득한 인생과
그렇지 않은 인생일 것이다.